입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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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입도조 한천의 행적

청주한씨세보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

서재공 휘 천 유허비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한천의 시주로 제작한 보물 제705호

 

 

m04.png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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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는 청주한씨의 입도조인 서재공 한천을 기리는 사당, 충의사(忠義詞)가 세워져 있다. 서재공 한천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밑에서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정몽주와 함께 조선을 세우려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 개혁파에 맞섰다. 그의 충정은 제주로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유배가 풀린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시리에 정착하며 청주한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은 서재공 한천의 유업을 기리고자 그의 정착지에 사당을 세워 선조의 정신과 가르침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그의 묘소는 점차 잊혔고, 후손들은 선조의 묘를 찾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53년 성산읍 신산리에 거주하던 고재관 씨가 꿈속에서 서재공의 영혼으로부터 묘소의 위치를 전해 받았다는 신비한 일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후손들은 마침내 잃어버린 선조의 묘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조상의 묘소를 찾고 보존하려는 후손들의 노력과 선조와의 영적인 연결"

 

세월이 흐르며 전해져 내려오는 한 가문에는 그 뿌리 깊은 전통과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 특히 선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그곳을 찾고 지켜나가는 것은 후손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청주한씨 입도조 서재공 한천 선조의 묘를 찾고 보존해 온 후손들의 노력은 바로 이러한 전통과 가르침을 이어가는 길이었다.

 

서재공 한천 입도조는 고려 말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분으로, 생애 마지막에는 제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묘소는 점차 잊히고,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가꾸던 제각 또한 세월의 흐름 속에 퇴락해 갔다. 여러 후손은 조상 묘를 찾아내고 그를 기리는 일이 끊기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금 그의 묘소를 찾고자 노력했지만, 묘소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그러던 중, 성산읍 신산리에 거주하던 석공 고재관 씨가 청주한씨 문중에서 보수 의뢰를 받게 되었다. 청주한씨 입도조 서재공 한천의 묘와 관련된 제각을 수리하는 일로, 비록 혈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 제각을 정성껏 보수하기로 결심했다.

 

제각은 바람과 비에 오랜 시간 시달려왔고, 이를 본연의 모습으로 가꾸는 일은 보통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 씨는 한 땀 한 땀 손길을 다해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긴 작업이 끝나고 고 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무겁고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며칠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때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꿈속에서 그는 제각의 넓은 마당을 걷고 있었다. 그 앞에 서재공 한천 입도조로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났고, 노인은 무언가 애달프게 바라보며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또렷했지만, 왜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고 씨는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털어놓았고, 아내는 몸이 쇠약해졌으니 편히 쉬어야 한다며 그를 달랬다. 하지만, 이 꿈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고, 고 씨의 삶에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이튿날 그의 두 살 된 딸이 갑작스럽게 고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는 이 모든 일이 제각 공사와 관련한 일이라며 연장들을 바닷물에 던져버리라고 했다. 고 씨는 충격에 잠긴 채 딸을 산에 묻고 지친 몸을 눕히고 다시 잠에 빠졌다.잠이 든 그는 다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딸을 안고 길을 걷고 있던 고 씨 앞에, 길을 막아선 노파가 나타났다. 딸을 달라던 노파는 아이를 품에 안고 제각으로 향했다. 고 씨는 그 뒤를 따랐다. 제각에 도착하니 서재공 선조로 보이는 노인이 다시 나타나 딸의 죽음은 덕을 쌓는 일이라며 그를 위로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고 씨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마음속에 뭔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며칠 후 그는 또다시 꿈속에서 서재공 입도조를 만났다. 이번에는 노인이 “아프다고 잠만 자서는 안 된다. 일어나 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네 번째 꿈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영감이 가시리 마을 서남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너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고, 노인은 초지에 있는 오래된 묘와 큰 돌을 잘 기억해 두라고 당부했다.꿈에서 깨고 난 후, 고 씨는 확신을 품고 노인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가시리 서쪽 약 5리 떨어진 소을악 남쪽 산기슭이었다.

 

후손들은 꿈속에서 본 표식을 바탕으로 모여서 이 지역을 탐색했고, 마침내 그곳에서 옛 무덤과 묘비를 찾아내게 되었다. 후손들은 마침내 서재공 한천의 묘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문중회장을 중심으로 50여 명의 후손들이 모여 묘소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며 서재공 선조의 묘임을 확정 지었다.후손들은 서재공 선조를 기리며 이곳을 다시 정비하고, 대대로 조상 묘소를 기리는 전통을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또한 고씨에게는 이 묘를 찾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서재공 한천 선조의 영혼이 후손들의 꿈에 나타나 전해준 가르침은 큰 감동을 주었고, 그를 기리기 위한 노력은 문중 후손들에게 전해지며 계속 이어져 갔다.고재관 씨는 자신의 삶에서 겪은 이 경험이 단순한 꿈을 넘어 선조의 뜻을 알리는 중요한 계시라고 느꼈다. 이 이야기는 고 씨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사람들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서재공 선조와 청주한씨 문중의 깊은 연대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재공 한천 선조의 묘소는 후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는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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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입도조 한천의 행적

 

청주한씨세보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

서재공 휘 천 유허비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한천의 시주로 제작한 보물 제705호

 

 

m04.png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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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는 청주한씨의 입도조인 서재공 한천을 기리는 사당, 충의사(忠義詞)가 세워져 있다. 서재공 한천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밑에서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정몽주와 함께 조선을 세우려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 개혁파에 맞섰다. 그의 충정은 제주로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유배가 풀린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시리에 정착하며 청주한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은 서재공 한천의 유업을 기리고자 그의 정착지에 사당을 세워 선조의 정신과 가르침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그의 묘소는 점차 잊혔고, 후손들은 선조의 묘를 찾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53년 성산읍 신산리에 거주하던 고재관 씨가 꿈속에서 서재공의 영혼으로부터 묘소의 위치를 전해 받았다는 신비한 일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후손들은 마침내 잃어버린 선조의 묘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조상의 묘소를 찾고 보존하려는 후손들의 노력과 선조와의 영적인 연결"

 

세월이 흐르며 전해져 내려오는 한 가문에는 그 뿌리 깊은 전통과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 특히 선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그곳을 찾고 지켜나가는 것은 후손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청주한씨 입도조 서재공 한천 선조의 묘를 찾고 보존해 온 후손들의 노력은 바로 이러한 전통과 가르침을 이어가는 길이었다.

 

서재공 한천 입도조는 고려 말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분으로, 생애 마지막에는 제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묘소는 점차 잊히고,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가꾸던 제각 또한 세월의 흐름 속에 퇴락해 갔다. 여러 후손은 조상 묘를 찾아내고 그를 기리는 일이 끊기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금 그의 묘소를 찾고자 노력했지만, 묘소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그러던 중, 성산읍 신산리에 거주하던 석공 고재관 씨가 청주한씨 문중에서 보수 의뢰를 받게 되었다. 청주한씨 입도조 서재공 한천의 묘와 관련된 제각을 수리하는 일로, 비록 혈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 제각을 정성껏 보수하기로 결심했다.

 

제각은 바람과 비에 오랜 시간 시달려왔고, 이를 본연의 모습으로 가꾸는 일은 보통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 씨는 한 땀 한 땀 손길을 다해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긴 작업이 끝나고 고 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무겁고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며칠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때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꿈속에서 그는 제각의 넓은 마당을 걷고 있었다. 그 앞에 서재공 한천 입도조로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났고, 노인은 무언가 애달프게 바라보며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또렷했지만, 왜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고 씨는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털어놓았고, 아내는 몸이 쇠약해졌으니 편히 쉬어야 한다며 그를 달랬다. 하지만, 이 꿈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고, 고 씨의 삶에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이튿날 그의 두 살 된 딸이 갑작스럽게 고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는 이 모든 일이 제각 공사와 관련한 일이라며 연장들을 바닷물에 던져버리라고 했다. 고 씨는 충격에 잠긴 채 딸을 산에 묻고 지친 몸을 눕히고 다시 잠에 빠졌다.잠이 든 그는 다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딸을 안고 길을 걷고 있던 고 씨 앞에, 길을 막아선 노파가 나타났다. 딸을 달라던 노파는 아이를 품에 안고 제각으로 향했다. 고 씨는 그 뒤를 따랐다. 제각에 도착하니 서재공 선조로 보이는 노인이 다시 나타나 딸의 죽음은 덕을 쌓는 일이라며 그를 위로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고 씨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마음속에 뭔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며칠 후 그는 또다시 꿈속에서 서재공 입도조를 만났다. 이번에는 노인이 “아프다고 잠만 자서는 안 된다. 일어나 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네 번째 꿈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영감이 가시리 마을 서남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너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고, 노인은 초지에 있는 오래된 묘와 큰 돌을 잘 기억해 두라고 당부했다.꿈에서 깨고 난 후, 고 씨는 확신을 품고 노인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가시리 서쪽 약 5리 떨어진 소을악 남쪽 산기슭이었다.

 

후손들은 꿈속에서 본 표식을 바탕으로 모여서 이 지역을 탐색했고, 마침내 그곳에서 옛 무덤과 묘비를 찾아내게 되었다. 후손들은 마침내 서재공 한천의 묘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문중회장을 중심으로 50여 명의 후손들이 모여 묘소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며 서재공 선조의 묘임을 확정 지었다.후손들은 서재공 선조를 기리며 이곳을 다시 정비하고, 대대로 조상 묘소를 기리는 전통을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또한 고씨에게는 이 묘를 찾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서재공 한천 선조의 영혼이 후손들의 꿈에 나타나 전해준 가르침은 큰 감동을 주었고, 그를 기리기 위한 노력은 문중 후손들에게 전해지며 계속 이어져 갔다.고재관 씨는 자신의 삶에서 겪은 이 경험이 단순한 꿈을 넘어 선조의 뜻을 알리는 중요한 계시라고 느꼈다. 이 이야기는 고 씨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사람들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서재공 선조와 청주한씨 문중의 깊은 연대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재공 한천 선조의 묘소는 후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는 유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