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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 시조 한란(韓蘭)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로, 그 유래는 시조 한란(韓蘭)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한란은 충북 영동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40세 무렵 그는 청주 상당구 방서동으로 이주하여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방정리 무농평의 농토를 개척하며 호족으로 성장했다. 당시 한란은 농업을 기반으로 지역사회를 이끌며 청주 일대에서 명망 높은 인물로 자리 잡았다.고려 태조 왕건이 928년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대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 왕건의 군사들에게 우물물을 제공하고 자신의 군사와 군마, 그리고 10만 대군이 먹을 군량미를 지원하였다.

 

한란은 왕건과 함께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이 공로로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에 책봉되고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다. 왕건은 한란의 집 앞 네모난 우물에 감명받아 이를 방정(方井)이라 이름 붙였고, 이는 한란 가문의 상징으로 전해졌다.한란의 묘는 조선 후기 문신 한익모(韓翼謩)의 찬으로 1768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원래 무덤은 1659년에 파손되었으나, 1663년 개장되어 1690년에 복원되었다. 묘소에는 문인석과 용마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한란이 남긴 유산의 가치를 대변한다. 이러한 공적과 유산으로 한란은 청주 한씨의 시조로 존경받으며, 그의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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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재

청주 한씨의 11대손으로 기록된 한천(韓倩)은 고려 왕조 말기의 중요한 정치 인물로, 제주 입도 조이다. 한천은 공양왕 시기에 대제학을 역임하며 온건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왕조의 중흥을 모색하며 정몽주와 함께 역성혁명 세력에 맞섰다.

 

정몽주와 공양왕의 사위 우성범을 중심으로 한천은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도전을 탄핵하는 등 정치적 공략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실패로 끝났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암살하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던 세력을 숙청하며 조선 왕조를 새로 세웠다. 한천은 이 과정에서 유배형을 선고받고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 이는 태조의 정비이자 한천의 누이였던 신의왕후(神懿王后)의 구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392년, 한천은 제주 정의현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장이었다. 한천은 유배지에서 지역민들에게 학문과 덕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정의현에 향교를 설립하여 학문을 가르쳤으며, 지역사회의 인문학적 기반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한천은 향약을 정립하며 인화와 예의의 기준을 세워 제주 지역사회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지역민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는 고려 왕조 말기 제주에서 한학의 개척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청주한씨 종손인 한천은 제주에서 생을 마감하고 중앙에서 종손의 역할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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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한씨는 이후 조선 왕조에서 문과 급제자 315명, 상신 12명, 공신 24명, 대제학 1명, 왕비 6명, 부마 4명을 배출하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조의 묘정에 배향된 한확(韓確)과 그의 아들 한명회(韓明澮)가 있다. 이들은 조선 초기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며 가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특히 조선의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태조 이성계의 조강지처이자 정비로, 2대 정종 이방과, 3대 태종 이방원을 낳았다.

또한, 세조의 장남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예종의 첫 왕비 장순왕후와 계비 안순왕후,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까지 총 6명의 왕비를 배출하며 조선 왕실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청주 한씨는 이러한 역사적 위상과 인물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명문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시조 한란의 희생과 공헌, 그리고 그의 11대손 한천의 학문적 성과와 지역사회 공헌은 청주 한씨 가문의 핵심적인 전통과 가치를 상징한다. 한란이 고려 왕조의 개국에 공헌하며 시작된 청주 한씨의 역사는, 한천이 유배지 제주에서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며 새로운 전통을 세운 것으로 이어지며,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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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 시조 한란(韓蘭)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로, 그 유래는 시조 한란(韓蘭)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한란은 충북 영동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40세 무렵 그는 청주 상당구 방서동으로 이주하여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방정리 무농평의 농토를 개척하며 호족으로 성장했다. 당시 한란은 농업을 기반으로 지역사회를 이끌며 청주 일대에서 명망 높은 인물로 자리 잡았다.고려태조 왕건이 928년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대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 왕건의 군사들에게 우물물을 제공하고 자신의 군사와 군마, 그리고 10만 대군이 먹을 군량미를 지원하였다.

 

한란은 왕건과 함께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이 공로로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에 책봉되고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다. 왕건은 한란의 집 앞 네모난 우물에 감명받아 이를 방정(方井)이라 이름 붙였고, 이는 한란 가문의 상징으로 전해졌다.한란의 묘는 조선 후기 문신 한익모(韓翼?)의 찬으로 1768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원래 무덤은 1659년에 파손되었으나, 1663년 개장되어 1690년에 복원되었다. 묘소에는 문인석과 용마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한란이 남긴 유산의 가치를 대변한다. 이러한 공적과 유산으로 한란은 청주 한씨의 시조로 존경받으며, 그의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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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재

청주 한씨의 11대손으로 기록된 한천(韓倩)은 고려 왕조 말기의 중요한 정치 인물로, 제주 입도 조이다. 한천은 공양왕 시기에 대제학을 역임하며 온건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왕조의 중흥을 모색하며 정몽주와 함께 역성혁명 세력에 맞섰다.

 

정몽주와 공양왕의 사위 우성범을 중심으로 한천은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도전을 탄핵하는 등 정치적 공략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실패로 끝났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암살하고, 고려 왕조를 지키려던 세력을 숙청하며 조선 왕조를 새로 세웠다. 한천은 이 과정에서 유배형을 선고받고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 이는 태조의 정비이자 한천의 누이였던 신의왕후(神懿王后)의 구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392년, 한천은 제주 정의현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장이었다. 한천은 유배지에서 지역민들에게 학문과 덕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정의현에 향교를 설립하여 학문을 가르쳤으며, 지역사회의 인문학적 기반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한천은 향약을 정립하며 인화와 예의의 기준을 세워 제주 지역사회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지역민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는 고려 왕조 말기 제주에서 한학의 개척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청주한씨 종손인 한천은 제주에서 생을 마감하고 중앙에서 종손의 역할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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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한씨는 이후 조선 왕조에서 문과 급제자 315명, 상신 12명, 공신 24명, 대제학 1명, 왕비 6명, 부마 4명을 배출하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조의 묘정에 배향된 한확(韓確)과 그의 아들 한명회(韓明澮)가 있다. 이들은 조선 초기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며 가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특히 조선의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태조 이성계의 조강지처이자 정비로, 2대 정종 이방과, 3대 태종 이방원을낳았다.

또한, 세조의 장남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예종의 첫 왕비 장순왕후와 계비 안순왕후,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까지 총 6명의 왕비를 배출하며 조선 왕실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청주 한씨는 이러한 역사적 위상과 인물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명문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시조 한란의 희생과 공헌, 그리고 그의 11대손 한천의 학문적 성과와 지역사회 공헌은 청주 한씨 가문의 핵심적인 전통과 가치를 상징한다. 한란이 고려 왕조의 개국에 공헌하며 시작된 청주 한씨의 역사는, 한천이 유배지 제주에서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며 새로운 전통을 세운 것으로 이어지며,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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