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
부군의 호는 서재(恕齋)입니다. 표선면 가시리에 거주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공의 옷과 신발을 보관한 곳이 그 근처에 있을 것이지만, 후손들이 같은 곳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맥이 끊겨 이를 지키지 못한 한스러움을 대대로 탄식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이 공을 추모함을 멈추지 않아, 옛터에 비석을 세우고 재실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1955년 부군의 묘소가 발견되었다. 단기 4288년(을미년, 1955년)
3월, 후손들은 정성을 다해 재각(齋閣)을 세웠는데, 낙성(완성) 전날 밤 성산면 신산리에 거주하는 고재관이라는 석공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나는 한 씨의 선조이다. 내 집을 자손들에게 전해다오.’라고 하며 묘소의 위치를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사흘 동안 계속되자, 앞서 언급된 고 씨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근처의 한 씨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이에 후손인 사율과 문섭을 비롯한 신산리 거주 후손 십여 명이 그 소식을 듣고 즉시 현장에 달려갔다. 그들은 마침내 가시리 옛터에서 서쪽으로 약 5리 떨어진 소을악의 남쪽 기슭에서 남향으로 놓인 큰 무덤을 발견했다.
이에 문중회장은 즉시 각처의 종친들에게 통보하여 오십여 명의 대표가 실지 조사를 하게 하였으며, 이 무덤의 위치, 구조, 형태 등을 통해 우리의 조상님 묘소임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충분함을 확인하였다. 추가 조사를 이어간 결과, 가시리에 거주하던 오응방 등 여러 고령의 주민들이 이 무덤이 한 씨의 묘라는 2, 300년간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있음을 증언했다. 이러한 이유로 무덤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역사적 고찰과 실제적인
판단으로 공의 묘소임이 확정되었으므로 종중의 뜻에 따라 개수하고 다시 봉분을 다졌다.
공과 더불어 고려 왕조의 중흥을 도모하시던 포은 정몽주 선생이 죽은 후 선죽교에 푸른 대나무가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지거니와, 공께서 돌아가신 후 500여 년 만에 다시 영혼이 나타나셨으니 참으로 군자의 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