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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입도조 한천의 행적

청주한씨세보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

서재공 휘 천 유허비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한천의 시주로 제작한 보물 제705호

 

 

m04.png 서재공 휘 천 유허비(恕齋韓公諱蕆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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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이곳에 서재공 한천의 유허비가 서 있다. 청주한씨 가문의 후손들은 이 유허비를 통해 깊은 역사와 선조의 숨결이 서려 있는 소중한 가문의 유산이자 자부심이다. 조선 말기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애국지사 최익현(면암) 선생께서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한라산에 올라 내려오는 길에 들른 이곳에서 서재공 한천의 유허를 발견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1873년, 최익현 선생은 유배 생활을 마친 뒤 한라산을 오르며 제주도의 경치를 눈에 담고 있었다. 그 길에 우연히 들른 가시리에서 그는 청주한씨 조상인 서재공 한천의 자취를 발견했다. 나라가 두 번 망하더라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떠올리며, 선생은 이곳에서의 심정을 《유한라산기》에 기록했다. 그가 남긴 기록은 후손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로 남아, 한씨 가문 사람들은 이를 기억하며 서재공 한천의 정신을 유허비로 새기게 되었다.

 

처음, 이 비석은 충의사 건물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06년에 이르러 청주한씨 제주 문중은 비석을 건물 밖으로 옮기고,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했다. 비각 안에서 비석은 세월의 바람과 비를 피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비각은 마치 비석을 지키는 든든한 요새처럼,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이러한 보존은 유물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 속에는 조상들의 충절을 지키고자 하는 후손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 유허비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충절을 지켰던 조상들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기념물이며, 청주한씨 후손들에게 가문의 자부심을 상기시켜 주는 상징이다. 가시리를 찾는 후손들은 이 비석 앞에 서서 조상들의 신념과 기개를 가슴 깊이 되새긴다. 이 비석은 조상의 신념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늘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서재공 한천 유허비는 앞으로도 우리 가문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변치 않는 역사의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과거를 배우고, 가문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의 마음을 되새기며 미래로 나아간다.

 

 

m04.png 서재공유허비기(恕齋韓公遺墟碑記) 해석 및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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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탐라(옛 제주) 정의현 가시리에 옛날 '서재(恕齋)'라는 칭호를 받은 한 공(韓公)께서 남기신 터가 있다. 산과 들이 이어져 동쪽으로 60여 리를 달려 평탄한 언덕과 긴 언덕에 이르러 평평하게 펼쳐지고, 지형이 고르고 정돈되어 마치 한 섬처럼 네 봉우리들이 사방을 둘러싼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띄는 곳이다. 이곳은 한 공께서 잠든 지 500여 년이 지났으며, 그의 사당과 서재, 여러 장소의 자리는 여전히 목자들이 가리키며 전해지고 있다. 그가 남긴 덕은 깊게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그 영향은 사람들에게 멀리까지 미치니, 이는 마치 그에게 소환된 듯하여 마을 사람들에게도 잊히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청주한씨는 저명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대위(大尉)까지 오르고 공적을 남긴 한 난(韓蘭)을 공의 10대 조상으로 삼았다. 공의 집안에는 대부, 대학자, 국사를 편찬하는 직책을 맡았던 분들이 계셨으며, 공의 외조부는 천안의 안 씨로, 고려 말기에 중요한 직책을 맡아 나라와 민중을 위해 헌신하였다. 공께서는 학문과 절개로 나라에 봉사하셨으며, 고려사에는 공민왕 20년에 경상도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의 왕조가 망한 후 그는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학문을 펼쳤다. 공의 아내는 광산 김씨로, 공과 두 아들(장남 주, 차남 제)과 함께 제주도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는 내륙과 떨어진 외딴섬으로, 공의 후손들이 내륙에까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후손이 없다'고 오해받았다. 하지만 김씨 집안의 기록에는 공과 두 아들이 분명히 관직에 오른 사실이 남아 있으며, 이는 후에 기록을 재정비할 때 참조하여 올바르게 정정해야 할 것이다. 공의 후손들이 널리 퍼져 제주의 여러 지역에서 문무를 겸비하고 효성과 우애를 다하며 학문에 힘쓰고 있다.

 

공께서는 후진을 교육하고, 그들의 능력을 시험하여 교육의 터전으로 삼으셨다. 이 자리에는 그가 교육을 위해 마련한 서재와 점당(書齋點堂)이 있어 여전히 후손들에게 그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그가 한의 후손들과 이 지역에 전해준 기운이 수천 년을 이어 변함없이 전해지고 있다.

숭정 후 오 년 기묘(1629) 중추에 월성 최익현이 이 터를 지나면서 감격하여 이 비문을 남기노라.

 

비석의 앞면에는 '恕齋韓公諱蕆遺墟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긴 문장이 새겨져 있다.

 

恕齋韓公遺墟碑記

서재한공유허비기

 

乇羅之旌義縣加時里有古恕齋韓公韓蕆遺墟漢拏脅脉連廷起伏東走六十

탁라지정의현가시리유고서재한공한천유허한라협맥연정기복동주육십

 

餘里至此而平岡長阜環合分開地勢平正瀛洲甲蟬兎撻·鳥鷹諸峯羅列四衛

여리지차이평강장부환합분개지세평정영주갑선토달·조응제봉라열사위

 

眺望佳勝儘靈境也今距公五百餘年其寢廓廚廏書齎點當諸位置牧老耕

조망가승진령경야금거공오백여년기침곽주구서재점당제위치목노경

 

叟尙歷歷指點記傳不忘如召茇鄭卿焉苟非公德入人深功及人遠者能如是乎謹

수상역역지점기전불망여소발정경언구비공덕입인심공급인원자능여시호근

 

按韓氏淸州著族有諱蘭佐高麗太祖開國官至太尉威襄寔爲公十世祖朝正

안한씨청주저족유휘란좌고려태조개국관지태위위양식위공십세조조정

 

大夫禮賓卿追封金紫光祿守司空左僕射諱光胤匡靖大夫修文殿太學士監修國

대부예빈경추봉금자광록수사공좌복사휘광윤광정대부수문전태학사감수국

 

史判典理事世子師致仕諡文蕙諱康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制誥諱

사판전이사세자사치사시문혜휘강첨의부좌사의대부보문각제학지제고휘

 

謝奇宣力佐理功臣上黨府院君賜鐵券諡思肅諱渥推忠協贊功臣匡靖大夫知사

기선력좌리공신상당부원군사철권시사숙휘악추충협찬공신광정대부지

 

都僉議司事諱大淳公五世也天安全氏同知密直進賢館大提學諱信公外祖也公

도첨의사사휘대순공오세야천안전씨동지밀직진현관대제학휘신공외조야공

 

生于麗季以學行節義國在掌敷文敎國凶扶植彝倫民到于今受其賜麗史

생우려계이학행절의국재장부문교국흉부식이륜민도우금수기사려사

 

所載恭愍王二十年辛亥二月以韓蕆爲慶尙道都巡問使恭讓王三年辛未判開城

소재공민왕이십년신해이월이한천위경상도도순문사공양왕삼년신미판개성

 

府事四年壬申七月王遜干原州斬丹陽君禹成範普原君姜準季流大提學韓蕆

부사사년임신칠월왕손간원주참단양군우성범보원군강준계류대제학한천

 

于濟州者此實錄也足徵百世矣公配光山金氏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知

우제주자차실록야족징백세의공배광산김씨광정대부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지

 

春秋館事上護軍章榮公諱稹女生二子長曰沫次曰濟金氏舊譜旣載公與二子

춘추관사상호군장영공휘진여생이자장왈말차왈제김씨구보기재공여이자

 

濟州官籍又可旣公子姓而獨於韓氏內地全譜以無後縣錄何故歟當時事情槩

제주관적우가기공자성이독어한씨내지전보이무후현록하고여당시사정개

 

可相己國破君亡公幸不死減律南流則遠海僻山於公可謂爰得我所欲晦響減

가상기국파군망공행불사감율남류칙원해벽산어공가위원득아소욕회향감

 

影與世無聞海旣遠而猶恨未遠山旣僻而猶恨未僻爲公子姓者豈不知乃父祖心

영여세무문해기원이유한미원산기벽이유한미벽위공자성자기불지내부조심

 

事也以心傳心歷數世未暇問聞於內地修譜而內地修譜諸公亦以水陸數千里外

사야이심전심역수세미가문문어내지수보 이내지수보제공역이수륙수천리외

 

聲息阻絶遂謂無後也然金譜官籍不泯有據此亦神理妙處嗣後有修當採而

성식조절수위무후야연금보관적불민유거차역신리묘처사후유수당채이

 

正之豈以公德深功遠而其後不昌大也螽期椒聊繩繩蕃衍其麗數千殆遍一洲或闡

정지개이공덕심공원이기후불창대야종기초료승승번연기려수천태편일주혹천

 

科官或著孝友多才藝多文學有未艾氣數報施之天果不惑哉又聞公居於是也以

과관혹저효우다재예다문학유미애기수보시지천과불혹재우문공거어시야이

 

敎育後進爲己任後進之勤慢能否必點考焉所謂書齋點堂是其址也鳴呼罔爲

교육후진위기임후진지근만능부필점고언소위서재점당시기지야명호망위

 

臣僕箕聖東來八條敎民而夷變爲夏恥事二姓公又南渡立約敎士而島漸興學

신복기성동래팔조교민이이변위하치사이성공우남도입약교사이도점흥학

 

德雖有深淺功雖有廣狹而氣脉相傳歷數千載而一揆不亦奇乎秉宅適過是

덕수유심천공수유광협이기맥상전역수천재이일규불역기호병택적과시

 

墟竊有曠感於心者書此遣韓氏俾竪碑以記之

허절유광감어심자서차견한씨비수비이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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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입도조 한천의 행적

 

청주한씨세보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

서재공 휘 천 유허비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한천의 시주로 제작한 보물 제705호

 

 

m04.png 서재공 휘 천 유허비(恕齋韓公諱蕆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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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이곳에 서재공 한천의 유허비가 서 있다. 청주한씨 가문의 후손들은 이 유허비를 통해 깊은 역사와 선조의 숨결이 서려 있는 소중한 가문의 유산이자 자부심이다. 조선 말기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애국지사 최익현(면암) 선생께서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한라산에 올라 내려오는 길에 들른 이곳에서 서재공 한천의 유허를 발견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1873년, 최익현 선생은 유배 생활을 마친 뒤 한라산을 오르며 제주도의 경치를 눈에 담고 있었다. 그 길에 우연히 들른 가시리에서 그는 청주한씨 조상인 서재공 한천의 자취를 발견했다. 나라가 두 번 망하더라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떠올리며, 선생은 이곳에서의 심정을 《유한라산기》에 기록했다. 그가 남긴 기록은 후손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로 남아, 한씨 가문 사람들은 이를 기억하며 서재공 한천의 정신을 유허비로 새기게 되었다.

 

처음, 이 비석은 충의사 건물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06년에 이르러 청주한씨 제주 문중은 비석을 건물 밖으로 옮기고,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했다. 비각 안에서 비석은 세월의 바람과 비를 피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비각은 마치 비석을 지키는 든든한 요새처럼,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이러한 보존은 유물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 속에는 조상들의 충절을 지키고자 하는 후손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 유허비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충절을 지켰던 조상들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기념물이며, 청주한씨 후손들에게 가문의 자부심을 상기시켜 주는 상징이다. 가시리를 찾는 후손들은 이 비석 앞에 서서 조상들의 신념과 기개를 가슴 깊이 되새긴다. 이 비석은 조상의 신념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늘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서재공 한천 유허비는 앞으로도 우리 가문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변치 않는 역사의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과거를 배우고, 가문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의 마음을 되새기며 미래로 나아간다.

 

 

m04.png 서재공유허비기(恕齋韓公遺墟碑記) 해석 및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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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탐라(옛 제주) 정의현 가시리에 옛날 '서재(恕齋)'라는 칭호를 받은 한 공(韓公)께서 남기신 터가 있다. 산과 들이 이어져 동쪽으로 60여 리를 달려 평탄한 언덕과 긴 언덕에 이르러 평평하게 펼쳐지고, 지형이 고르고 정돈되어 마치 한 섬처럼 네 봉우리들이 사방을 둘러싼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띄는 곳이다. 이곳은 한 공께서 잠든 지 500여 년이 지났으며, 그의 사당과 서재, 여러 장소의 자리는 여전히 목자들이 가리키며 전해지고 있다. 그가 남긴 덕은 깊게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그 영향은 사람들에게 멀리까지 미치니, 이는 마치 그에게 소환된 듯하여 마을 사람들에게도 잊히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청주한씨는 저명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대위(大尉)까지 오르고 공적을 남긴 한 난(韓蘭)을 공의 10대 조상으로 삼았다. 공의 집안에는 대부, 대학자, 국사를 편찬하는 직책을 맡았던 분들이 계셨으며, 공의 외조부는 천안의 안 씨로, 고려 말기에 중요한 직책을 맡아 나라와 민중을 위해 헌신하였다. 공께서는 학문과 절개로 나라에 봉사하셨으며, 고려사에는 공민왕 20년에 경상도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의 왕조가 망한 후 그는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학문을 펼쳤다.

공의 아내는 광산 김씨로, 공과 두 아들(장남 주, 차남 제)과 함께 제주도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는 내륙과 떨어진 외딴섬으로, 공의 후손들이 내륙에까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후손이 없다'고 오해받았다. 하지만 김씨 집안의 기록에는 공과 두 아들이 분명히 관직에 오른 사실이 남아 있으며, 이는 후에 기록을 재정비할 때 참조하여 올바르게 정정해야 할 것이다. 공의 후손들이 널리 퍼져 제주의 여러 지역에서 문무를 겸비하고 효성과 우애를 다하며 학문에 힘쓰고 있다.

공께서는 후진을 교육하고, 그들의 능력을 시험하여 교육의 터전으로 삼으셨다. 이 자리에는 그가 교육을 위해 마련한 서재와 점당(書齋點堂)이 있어 여전히 후손들에게 그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그가 한의 후손들과 이 지역에 전해준 기운이 수천 년을 이어 변함없이 전해지고 있다.

숭정 후 오 년 기묘(1629) 중추에 월성 최익현이 이 터를 지나면서 감격하여 이 비문을 남기노라.

 

비석의 앞면에는 '恕齋韓公諱蕆遺墟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긴 문장이 새겨져 있다.

 

恕齋韓公遺墟碑記

서재한공유허비기

 

乇羅之旌義縣加時里有古恕齋韓公韓蕆遺墟漢拏脅脉連廷起伏東走六十

탁라지정의현가시리유고서재한공한천유허한라협맥연정기복동주육십

 

餘里至此而平岡長阜環合分開地勢平正瀛洲甲蟬兎撻·鳥鷹諸峯羅列四衛

여리지차이평강장부환합분개지세평정영주갑선토달·조응제봉라열사위

 

眺望佳勝儘靈境也今距公五百餘年其寢廓廚廏書齎點當諸位置牧老耕

조망가승진령경야금거공오백여년기침곽주구서재점당제위치목노경

 

叟尙歷歷指點記傳不忘如召茇鄭卿焉苟非公德入人深功及人遠者能如是乎謹

수상역역지점기전불망여소발정경언구비공덕입인심공급인원자능여시호근

 

按韓氏淸州著族有諱蘭佐高麗太祖開國官至太尉威襄寔爲公十世祖朝正

안한씨청주저족유휘란좌고려태조개국관지태위위양식위공십세조조정

 

大夫禮賓卿追封金紫光祿守司空左僕射諱光胤匡靖大夫修文殿太學士監修國

대부예빈경추봉금자광록수사공좌복사휘광윤광정대부수문전태학사감수국

 

史判典理事世子師致仕諡文蕙諱康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制誥諱

사판전이사세자사치사시문혜휘강첨의부좌사의대부보문각제학지제고휘

 

謝奇宣力佐理功臣上黨府院君賜鐵券諡思肅諱渥推忠協贊功臣匡靖大夫知사

기선력좌리공신상당부원군사철권시사숙휘악추충협찬공신광정대부지

 

都僉議司事諱大淳公五世也天安全氏同知密直進賢館大提學諱信公外祖也公

도첨의사사휘대순공오세야천안전씨동지밀직진현관대제학휘신공외조야공

 

生于麗季以學行節義國在掌敷文敎國凶扶植彝倫民到于今受其賜麗史

생우려계이학행절의국재장부문교국흉부식이륜민도우금수기사려사

 

所載恭愍王二十年辛亥二月以韓蕆爲慶尙道都巡問使恭讓王三年辛未判開城

소재공민왕이십년신해이월이한천위경상도도순문사공양왕삼년신미판개성

 

府事四年壬申七月王遜干原州斬丹陽君禹成範普原君姜準季流大提學韓蕆

부사사년임신칠월왕손간원주참단양군우성범보원군강준계류대제학한천

 

于濟州者此實錄也足徵百世矣公配光山金氏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知

우제주자차실록야족징백세의공배광산김씨광정대부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지

 

春秋館事上護軍章榮公諱稹女生二子長曰沫次曰濟金氏舊譜旣載公與二子

춘추관사상호군장영공휘진여생이자장왈말차왈제김씨구보기재공여이자

 

濟州官籍又可旣公子姓而獨於韓氏內地全譜以無後縣錄何故歟當時事情槩

제주관적우가기공자성이독어한씨내지전보이무후현록하고여당시사정개

 

可相己國破君亡公幸不死減律南流則遠海僻山於公可謂爰得我所欲晦響減

가상기국파군망공행불사감율남류칙원해벽산어공가위원득아소욕회향감

 

影與世無聞海旣遠而猶恨未遠山旣僻而猶恨未僻爲公子姓者豈不知乃父祖心

영여세무문해기원이유한미원산기벽이유한미벽위공자성자기불지내부조심

 

事也以心傳心歷數世未暇問聞於內地修譜而內地修譜諸公亦以水陸數千里外

사야이심전심역수세미가문문어내지수보 이내지수보제공역이수륙수천리외

 

聲息阻絶遂謂無後也然金譜官籍不泯有據此亦神理妙處嗣後有修當採而

성식조절수위무후야연금보관적불민유거차역신리묘처사후유수당채이

 

正之豈以公德深功遠而其後不昌大也螽期椒聊繩繩蕃衍其麗數千殆遍一洲或闡

정지개이공덕심공원이기후불창대야종기초료승승번연기려수천태편일주혹천

 

科官或著孝友多才藝多文學有未艾氣數報施之天果不惑哉又聞公居於是也以

과관혹저효우다재예다문학유미애기수보시지천과불혹재우문공거어시야이

 

敎育後進爲己任後進之勤慢能否必點考焉所謂書齋點堂是其址也鳴呼罔爲

교육후진위기임후진지근만능부필점고언소위서재점당시기지야명호망위

 

臣僕箕聖東來八條敎民而夷變爲夏恥事二姓公又南渡立約敎士而島漸興學

신복기성동래팔조교민이이변위하치사이성공우남도입약교사이도점흥학

 

德雖有深淺功雖有廣狹而氣脉相傳歷數千載而一揆不亦奇乎秉宅適過是

덕수유심천공수유광협이기맥상전역수천재이일규불역기호병택적과시

 

墟竊有曠感於心者書此遣韓氏俾竪碑以記之

허절유광감어심자서차견한씨비수비이기지